- [성경본문] 누가복음24:13-35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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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2020년 4월 19일 창원더사랑교회 주일설교
본문: 눅 24:13-35
샬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코로나19전염병으로 우리교회는 9주째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제 코로나19 전염병의 확산세가 많이 차단되었습니다.
그동안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장을 비롯한 공무원들과 의사, 간호사, 간호조무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의 수고와 헌신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예배하지 못하는 어려움가운데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각 가정에서 예배를 드려 오신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지난주에는 제 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더불어 민주당의 압승으로 선거가 종료되었고, 미래통합당의 황교안 대표가 선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는 일까지 발생하였습니다. 더불어 민주당은 잔치집인 반면 미래통합당은 초상집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 선거가 민주당뿐만 아니라 미래통합당에게도 유익한 선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미래통합당의 입장에서 보면 국민의 뜻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국민의 뜻을 제대로 정치에 반영하지 못하는 국회의원은 국회의원으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미래통합당은 다시 한 번 국민의 뜻을 바로 알고 새롭게 태어날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래통합당은 실망할 필요가 없고, 다시 국민들의 뜻에 맞는 정치를 하기 위해 다시 새롭게 출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어느 정당 출신이든지 낙선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국민들의 뜻을 알게 된 것을 매우 유익한 것으로 알고 새롭게 국민의 뜻을 바로 알고,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 신앙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의도한 대로 되지 않는다고 우리는 낙심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의도한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알면 내가 의도한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것은 유익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절후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누가복음 24:13-35절까지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제일 먼저 목격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였습니다. 이들이 빈 무덤을 보고 근심하고 있을 때 천사들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에게 무엇이라 말했는지를 생각해 봐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자들이 전에 자신들에게 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제자들에게 돌아가서 열한 사도와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제자들이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지요.
그 들 중에 ‘글로바’라 하는 제자와 다른 제자 한 명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리(약 10km) 되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면서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서 그들과 동행하면서 묻습니다. 그 두 사람은 이 분이 예수님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너희가 길을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그러자 그 들 중에 한 사람인 글로바가 대답합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말하는 사람은 나사렛 예수이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모든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신데,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다. 이 일이 일어난 지 사흘이 되었는데,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대신 그가 살아났다는 천사들을 보았다고 했고, 우리와 함께 있었던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보니까 여자들이 말한 것과 같은 것을 보았지만 예수는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이런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믿지 못하는 것이죠.
그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눅 24:25-26
『[25]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시면서 성경을 풀어서 설명해 주시는데,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이사야서 53장의 메시야 고난에 관한 말씀도 설명하였을 것입니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시편 16편의 부활에 관한 말씀도 풀어서 설명해 주었을 것입니다.
“『[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그 외에 많은 말씀들을 풀어서 설명해 주니까 그 말씀이 얼마나 귀에 쏙쏙 들어오는지 너무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마을에 도착하게 되니까 예수님은 계속 길을 가려고 하시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붙잡고는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까 우리 함께 이 마을에서 묵읍시다.’
예수님께서 마을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는데, 바로 그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비로소 그 말씀하신 이가 예수님인 줄 알아보았는데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에 기록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첫 모습입니다. 이 사건을 살펴보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듣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시는데 그 말씀이 너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귀에 쏙쏙 들어오고 예수님과 밤새면서 말씀을 나누기 위하여 계속 길을 가려는 예수님을 강권하여 함께 마을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감격이 있는 사람은 말씀을 너무 너무 좋아 합니다.
사람들은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책을 통해 유명 저자와의 만남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논어를 통해 공자를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책 한 줄의 명언이 자신의 삶을 바꿨다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만날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삶과 생애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예수님의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어서 그것만 가지고도 자신의 삶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러한 만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 1:3,4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
예수님은 스스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의 전 생애를 통틀어서 최고의 순간입니다. 사실은 기적입니다. 내 생애에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이 믿어질 수 없는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그러니 그 말씀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합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말씀을 풀어 설명해주는데 그렇게 말씀이 재미있고 달 수가 없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펴서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것은 논어를 읽고, 암송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을 편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그 말씀을 설명해 주는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성경이 너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습니다. 우리 더사랑교회 성도 여러분에게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이 너무 너무 좋아서, 그 성경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하는 그 열망이 저와 여러분에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서로 말을 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시는데 그들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동이 솟아났습니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이 말씀을 설명할 때는 정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 당하신 것이 나의 죄악 때문이구나, 나의 허물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모진 고난을 당하셨구나. 마음에 큰 감동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에 감동이 되고, 무엇보다도 내가 따랐던 그 예수님이 진실로 오리라 한 메시야구나 라는 확신이 그들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설교를 듣는데도 마음에 아무런 감동이 없지는 않습니까? 속히 하나님께로 돌아오세요. 마음이 굳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속히 돌아와야 합니다. 속히 돌아오지 않으면 계속 굳어집니다. 굳어짐이 오래 가면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그 때는 성경을 읽고 싶지도 않고, 암송하고 싶지도 않고, 설교를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지난 2월에 제 3기 신학생 암송수련회를 했는데, 대부분의 신학생들이 말씀암송하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분들 암송하는 것을 계속 도와주기 위해서 카톡방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어떤 분이 보고를 하는데 어떤 날은 하루에 다섯 시간, 어떤 날은 세 시간..얼마나 암송을 열심히 하는지 벌써 5단계를 다 마치고 이제는 반복암송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암송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그 카톡방에 우리가 했던 잠언 40일 묵상집도 매일 매일 올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전도사님은 자녀들과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고, 또 어떤 전도사님은 가정이 예배처소가 되어서 개척교회가 된 것 같다고 합니다. 제가 미처 올리지 못할 때는 올려달라고 카톡이 옵니다. 그러면 제가 밤 9시나 10시가 넘어서 올려주기도 합니다. 그 가정은 언제나 올려줄까 기다리는 거에요. 사모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짐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늘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 배우는 것을 사모하고, 암송하는 것을 사모하고, 설교를 듣는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하여 가슴이 뜨거워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바꿉니다.
엠마오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는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열한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고 전하면서 자신들에게 있었던 일을 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가던 길을 돌이켰습니다.
그들이 엠마오로 가던 길은 슬픔 그 자체였습니다. 근심이 가득했고, 절망이었습니다.
그 날이 어떤 날이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밝고 아름다운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근심이 가득했고 슬픔가운데,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들은 자신들이 가던 길을 돌이켰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길을 돌이켜서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절망과 한숨과 근심의 마음을 돌이켜서 환희와 기쁨과 감격의 마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슬픔과 절망과 패배의 길이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은 희망과 승리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엠마오로 가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이들은 엠마오가 고향이었을 것입니다. 고향에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다녔겠지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이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보면 제법 예수님과 가까이 지냈던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요즘 말로하면 예수님의 12제자들을 제외한 사람 중에서 예수님의 최측근 중의 한 명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되면 한 자리 차지하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갔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는 모습을 직접 경험하고는 매우 낙담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도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고, 이제 살길을 찾아 전에 하던 일을 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무언가 큰 꿈을 이루기 위해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왔지만 그 꿈을 포기하기에는 3일이면 충분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만 하루 반 만에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 변하기가 이렇게 쉽습니다. 꿈을 포기하기에는 한 달이란 시간이 필요하지 않고 딱 하루 반이면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들은 자신들이 가던 길을 돌이켜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목적지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열한 제자와 다른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절망가운데 과거 하던 일을 하리라 마음먹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목적이 바뀝니다. 직장 생활하는 목적이 바뀌고, 공부하는 목적이 바뀝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 바뀌고, 나의 존재 목적이 바뀌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그의 목적도 바뀌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을 목격하고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맹수가 둘러싸는 공포와 위협가운데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켜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삶의 전부였고, 예수님이 그들의 존재목적이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우리의 목적을 바꾸어야 하겠지요. 공부하는 목적도 바뀌어야 하고, 내가 돈을 버는 목적도 바꾸어야 하겠지요. 과거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살았던 것처럼 예수님이 나의 우리의 삶의 전부이고, 예수님이 우리의 존재목적인 삶을 살아야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존재 목적이 바뀌었다. 공부하는 목적이 바뀌었다. 돈을 버는 목적이 바뀌었다. 예수님이 나의 삶의 전부이다. 예수님이 나의 존재목적이다”
이런 말은 교회를 좀 다녀본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말로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로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살아가는 것은 말로 사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목적이 바뀐 사람, 존재 목적이 바뀐 사람, 돈을 버는 목적이 바뀐 사람, 예수님이 나의 삶의 전부인 사람은 구체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추상적으로 하지 말고 구체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 기독교의 핵심가치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말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웃을 사랑한다. 부모를 사랑한다. 자녀를 사랑한다. 나라를 사랑한다” 사랑 사랑 늘 우리는 사랑을 외칩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외치는 기독교의 핵심가치가 추상적으로 느껴지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그 상대방의 뒷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앞을 가꾸기 때문에 자신을 포장합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억지로 웃습니다. 눈물을 흘리더라도 앞에서는 울지 않고 참아요.
그러나 뒷모습은 가꿀 수가 없어요. 아버지의 쳐진 뒷모습이 보이면 자식이 이제 철이 든 것입니다. 어머니의 쪼그라진 뒷모습이 보이면 그것이 사랑입니다. 자녀의 뒷모습이 보이면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요, 목회자가 힘들어하는 뒷모습이 보이고, 성도가 힘들어하는 뒷모습이 보이면 그것이 사랑입니다. 형제의 뒷모습이 보이면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뒷모습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가 없어요. 엄마, 아빠의 뒷모습을 보지 못하는 자식은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의 뒷모습을 보지 못하는 부모는 바른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의 뒷모습을 보지 못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형제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구체적이어야 비로소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정과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쓸쓸한 뒷 모습, 쳐진 뒷 모습, 슬픈 뒷 모습을 보고 뒤에서 살포시 안아주는 사람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살포시 안아주세요.
어린이부와 청소년부 학생들은 아직 부모님의 뒷모습을 발견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들이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혹여라도 그러한 부모님의 힘들고 어려운 뒷모습이 보인다면 엄마, 아빠를 살포시 안아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열망하며 살아갑시다. 한번 먹게 되면 끝없이 먹게 되는 새우깡처럼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골을 끓이면 끓일수록 맛이 깊이 베어나는 것처럼 암송하면 암송할수록 맛이 깊이가 느껴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열망하며 살아갑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암송하며 냉랭한 마음이 아니라 뜨거운 마음을 가집시다. 내 마음이 식어지고 차가워지지는 않았는지 날마다 점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뜨거운 마음을 회복합시다. 말씀대로 살지는 못했는지 날마다 나의 삶을 되돌아보고, 날마다 거울을 쳐다보면서 자신의 얼굴을 관리하듯이 날마다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우리의 목적을 바꿉시다. 엠마오로 가던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향한 두 제자처럼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적을 예수님에게로 바꾸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바꾼 삶이 추상적인 삶이 아니라 이제는 구체적인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고 살포시 안아줄 수 있는 삶 그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삶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는 우리가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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