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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강동협 2023-01-08 추천 0 댓글 0 조회 373
[성경본문] 마태복음3:13-17 개역개정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202318일 창원더사랑교회 주일설교

본문: 마태복음 3:13-17

샬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옆에 계신 분들과 천국인사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행복하십시오.

 

오늘은 교회력으로 볼 때 주현절 후 첫째 주일이며, 주님수세주일입니다. 16일을 주현절로 지키는데, 주현절은 주님이 현현하신 날, 주님이 나타나신 날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동방교회에서는 이 주현절을 성탄절로 지키면서 이 날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것과 예수님께서 가나혼인잔치에서 최초로 이적을 행하신 사건을 기념합니다. 로마카톨릭과 우리 개신교는 서방교회 전통을 따라서 주현절 후 첫째 주일을 주님수세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물수) (씻을 세)

그래서 주님수세주일은 예수님이 세례 받음을 기념하는 주일이 되겠습니다.

 

, 그렇다면 이렇게 교회가 이 날을 주님수세주일로 지키고, 동방교회에서도 주현절을 성탄절로 지키면서 주님이 세례 받으신 사건을 왜 기념하고 있는가? 이렇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 그러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사건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첫째, 예수님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분이신데, 그 분이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세례요한이 주는 세례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하여 요단강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일반 백성들만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고, 군인도 세례를 받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까지도 세례요한에게 나와 세례를 받았습니다. 왜 그들이 세례요한에게 나왔겠습니까? 죄사함을 받으려고 세례를 받았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려고 하자 세례요한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자신에게 나와 회개의 세례를 받고자 하자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만류를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 와서 세례를 받습니까?”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해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여러분, 우리는 죄가 없는데 죄인 취급을 받으면 어떻습니가?

기분이 나쁩니다. 기분이 나쁠 뿐만 아니라 억울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억울함을 풀기 위하여 많은 애를 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장면이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스스로 죄인의 자리에 내려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면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가시고,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인류가 받을 모든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받으신 세례는 앞서서 백성들이 받은 세례와 같이 단순한 회개의 세례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사건을 예표하는 사건으로서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 하나님의 신비한 교제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립니다. 저는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이 너무 좋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서 예수님의 위에 임합니다. 비둘기가 예수님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내려오셔서 예수님 위에 임하시는 것이지요.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예수님께서 받지 않아도 될 죄의 심판 곧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들이 이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됨을 기뻐하는 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성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받지 않아도 되는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을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이렇게 세상에 예수님을 공포하시는 이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저는 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얼마나 신비하고 아름다운지 모르겠습니다.

 

,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교훈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함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죄가 없는데도 죄인처럼 취급을 당하면 기분이 상하고 억울해서 잠을 못잡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의 자리로 나가서 죄인들이 받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같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겸손의 최고봉을 보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모습도 겸손의 최고봉의 모습이며, 이 겸손은 예수님의 본질입니다. 여기에서 본질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겸손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 존재 그 자체가 겸손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 억지로 겸손한 것처럼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겸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예수님처럼 겸손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존재 그 자체가 겸손인 이유는 예수님은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억지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겸손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겸손 그 자체인 이유는 예수님은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사랑에서 겸손이 나오는 겁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서 그 사람에 대한 겸손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면 아내에게 겸손해 집니다. 남편을 사랑하면 남편에게 겸손해지고, 목회자를 사랑하면 목회자에게 겸손해지고, 성도를 사랑하면 성도에게 겸손해 집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사람에게 겸손해 집니다. 동물을 사랑하면 동물에게 겸손해 지고, 부하직원을 사랑하면 부하직원에게 겸손해 지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본질과 능력과 영광면에서 동등하신 성부 하나님께 겸손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군림하지 않고, 사람에게 겸손할 수 있었던 이유도 예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억지로 겸손할 수가 없습니다. 겸손한 척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는 진짜 겸손이 나오지 않습니다. 진짜 겸손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해야 허리가 숙여집니다. 사랑해야 진정한 마음에서 나오는 겸손함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정으로 겸손한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9-11절 말씀을 보면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예수님은 마태복음 23:11,12절에서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태복음 20:26,27절에서 “(26)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태복음 18:4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천국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가장 큰 자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러한 겸손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한 교제를 통하여 우리의 삶도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양식은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존재양식을 우리 머리로는 잘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주 속 시원하게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삼위일체로 존재하는 하나님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모두 하나님이시면서도 세분이 아니라 한 분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면서도 성부보다 열등하지 않으시고, 그 본질과 능력과 영광이 동일하시고, 성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듯이 성자 하나님도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 하나님에게서 나오시지만 그 모든 능력과 영광과 본질이 성부와 성자와 동일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서로 다른 분 같은데 성경은 이 세 위격이 셋이 아니라 하나라고 말씀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면서도 동시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삼 위는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따로 존재하지 않고 늘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 존재 자체가 신비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의 신비한 교제가 우리 눈에 그려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의 신비한 교제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관심 갖고 봐야 할 것은 성령께서 나타나신 모양입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님께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평화가 누구와의 평화를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위하여,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화평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오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위해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화목할 수가 있습니다.

 

, 그러면 누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사람의 능력으로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고, 이 성령의 역사로 우리는 성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임하신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중요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시만 저와 여러분의 모든 삶의 자리에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도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주셨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늘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고, 우리가 아파하고 슬퍼할 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고 탄식하며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기도 하고,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다시 부활했으며,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한 형제 자매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하나님을 머리로 이해하려 하지 마시고, 가슴으로 성령님을 느끼십시오. 성령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교회 가운데 함께 하시고, 성령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저와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공기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늘 공기를 통해서 숨을 쉬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그리스와 하나가 되고,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머리로 이해하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하나님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세계를 사람의 머리로 다 어떻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신앙이 사람의 머리로 다 이해가 된다고 한다면 그 신앙은 하나님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를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에 걸맞는 우리의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여러분 가슴으로 느끼십시오. 그리고 영으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호흡하면서, 숨을 내쉬면서 성령님의 숨결을 느껴보십시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삼위일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그 신비한 신앙의 세계를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성령님을 통해 성부하나님과 교제하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슴으로 느끼면서 하나님의 세계를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겸손하게 하여 주옵소서. 더욱 사랑하게 하시고, 더욱 겸손하게 하옵소서. 성령님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가운데 믿음생활하는 신앙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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