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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걸어가는 여행
강동협 2021-01-30 추천 0 댓글 0 조회 629
[성경본문] 히브리서11:24-27 개역개정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제공: 대한성서공회

믿음으로 걸어가는 여행

 

2021131일 창원더사랑교회 주일 설교

 

본문: 11:24-27

 

샬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모세의 출생은 부모의 입장에서는 최대의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순간입니다. 왕의 명령대로 갓난 아기를 나일강에 던지면 아기가 죽을 것이고, 왕의 명령을 거역하면 온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석 달 동안 숨겨서 아기를 키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숨겨 키우기에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자 당시 애굽왕 바로의 공주가 나일 강에 목욕하러 나온 다는 사실을 알고는 바로의 공주 눈에 띄기 작전을 감행합니다. 정말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애굽왕 바로의 무남독녀인 핫셉슈트 공주의 눈에 띄었고, 핫셉슈트 공주는 모세를 아들로 삼을 뿐만 아니라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을 모세의 유모로 삼아, 모세에게 젖을 먹이게 합니다. 그리고 요게벳은 자신이 낳은 모세에게 젖을 먹이면서 히브리교육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겉사람으로는 애굽의 왕자로 살았지만 속사람은 히브리인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모세는 히브리 동족이 애굽사람에게 맞는 것을 보고는 화가 나서 그 애굽사람을 죽이게 되고, 모세가 애굽사람을 죽인 것을 바로가 알게 되어서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 그런데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서 미디안 땅으로 도망간 사실을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의 기자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27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사실 모세는 애굽 왕도 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를 아들로 삼은 애굽의 핫셉슈트 공주는 후에 애굽의 제18왕조의 여왕이 되었기 때문에 모세는 그 뒤를 이어서 충분히 왕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히브리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갖고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애굽의 왕궁에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히브리 사람을 도와주다가 본의 아니게 애굽 사람을 죽이게 되어서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기까지는 히브리서 기자의 시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이 모세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의 왕자입니다. 딱 눈감고 히브리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무시하고 애굽 왕자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 히브리인의 정체성을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왕궁에서 애굽 왕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얼마든지 부여할 수 있습니다. 애굽의 왕자로 있으면서 얼마든지 히브리 사람을 도와줄 수 있지요. 자신이 정말 잘되어서 자신이 애굽의 바로가 되면 히브리 민족에게 자유를 줄 수도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민족을 구원한 것처럼 모세가 애굽의 바로가 되어서 히브리민족을 해방시켜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얼마든지 모세는 히브리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애굽 왕자로 충분히 살아갈 정당성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혜롭지 못하고 굉장히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애굽 왕자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애굽의 종살이하면서 고생하고 있는 히브리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그만 혈기를 참지 못해 한 방에 날린 것이지요. 적어도 세상의 지혜로 보면 그렇습니다.

 

정말 히브리인으로서 모세는 애굽의 바로가 되어서 히브리인을 해방시켜주는 것이 최고의 미션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에 제가 모세였다면 저는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참 생각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생각만 부족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혈기도 참지 못하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대업을 망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 보면 그렇습니다.

 

,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세상의 지혜로 보면 모세가 애굽의 바로가 되어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 주면 그 어릴 적에 나일강에서 건짐을 받은 아기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된 것에 대한 최고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 지혜로 보면 이것이야말로 애굽 왕자로서의 모세의 사명, 모세의 최고의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모세의 연약함을 그대로 이용합니다. 모세의 부족함..생각이 짧고,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분노를 참지 못하는 모세의 단점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부족함을 그대로 인정하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가 나서 미디안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히브리인을 도와 애굽 사람을 죽이게 된 이유를 따지다 보면 자신이 본래 히브리 사람이라는 사실이 들통이 나게 되고, 결국 왕권을 둘러싼 치열한 세력다툼이 있는 왕궁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결국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게 되는데, 바로 그 곳에서 모세는 미디안의 제사장인 르우엘의 딸인 십보라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결혼하여 40년 간을 광야에서 보내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는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이끌 지도자로서 40년간을 미리 앞서 살아보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시나리오입니까?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세를 통해 구원할 계획을 갖고 계셨지만 모세가 애굽의 바로가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시킬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혜로 생각해 보면 그것이 가장 타당하고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정말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 이상의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애굽 왕 바로가 선정을 베풀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굽왕 바로가 더 악랄해져서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는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고 말하면 말할수록 애굽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더 고통스럽게 한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애굽에 재앙을 일으키게 됩니다. 애굽과 가까운 곳만 아니라 저 멀리에 있는 나라에서 들으면 깜짝 놀랄만한 재앙을 일으킨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9:17절에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바로의 악랄함 때문에 하나님은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일으키셨고,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아와서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넜지만 애굽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키게 됩니다. 이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마르게 한 사건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저 멀리 가나안 땅에서조차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회자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있는 사람들이 저 멀리 애굽에서 일어난 이 이야기를 듣고 간담이 녹게 됩니다.

이것을 가나안 땅 여리고에 있던 기생 라합이 여리고를 정탐하러 온 두 명의 정탐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수아 2:9,10절에,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를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가 가늠하기에는 정말 놀랍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합당하게 생각하는 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는지 몰라도 그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

 

세상 지혜로 보면 모세의 짧고, 어리석고, 사리분별하지 못하고 혈기에 찬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지혜로 보면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믿음의 행동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지혜로 보면 모세는 혈기를 부려서 애굽 사람을 쳐죽이게 되고, 죽음이 두려워서 미디안 땅으로 도망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지혜로 보면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40년간을 광야에서 인내의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가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던 40년 광야생활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광야 40년은 세상지혜로 보면 참 어리석은 행동이 나은 최악의 40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후대 1500년 후에 히브리서 기자는 무엇이라고 기록합니까? 믿음의 행동으로 기록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모세가 경험한 최악의 40, 애굽의 최고 권력자인 바로가 될 수도 있는 최고의 위치에서 도망자 신세가 되어서 화려한 애굽 왕궁이 아니라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살았던 모세의 40, 그의 40년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의 40년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보면 최악의 40년이라 할 수 있겠지만 모세가 걸은 40년은 믿음으로 걸어가는 40년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이 세상의 지혜로 보면 최악의 상황일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혹은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 자초한 고생의 길일수도 있습니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후대 히브리서 기자의 기록은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던 믿음의 40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그리고 성도님 여러분, 여러분 앞에 있는 고난 때문에 좌절하지 마십시오.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다만 여러분이 걸어가는 길이 믿음의 길이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자신의 광야생활을 언제 마감할지 모르는 가운데 40년을 그렇게,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최종 어떻게 마무리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믿음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심지어 모세는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의 삶이 그렇게 인정받는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믿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우리는 최종 믿음의 끝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모세는 믿음의 끝을 몰랐어도 지금 우리는 그 끝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든지 간에 최종 믿음의 끝은 승리이며, 면류관을 얻는 것입니다.

 

월드컵을 볼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생중계는 조마조마합니다. 아마도 선수의 부모님은 자기 자식이 뛰는 월드컵 경기를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가슴이 졸여서 볼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월드컵 경기에서 승부가 나지 않아서 승부차기에 들어갔는데 마지막 키커로 자기 자식이 공을 찬다고 하면 그 순간 부모는 멀쩡한 눈을 놔두고도 제대로 그 순간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 졸여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승부가 결정 난 경기, 이미 승리한 경기는 편안하게 그 경기를 관람합니다. 심지어 이미 승리한 경기는 전반전에 1-4로 지고 있어도 편하게 관람합니다. 왜냐하면 후반전에서 5골을 넣을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4로 지고 있어도 답답하지 않고, 평안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끝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미 믿음의 끝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고난과 어려움도 넉넉하게 참을 수가 있고, 인내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승리의 면류관은 우리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내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절망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나에게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여러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실 자기 자신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학생들은 자기가 앞으로 뭘 할지도 모르고, 무엇을 잘 해낼지도 모르고, 내가 무엇을 해야 행복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하여서 그것이 반드시 나에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확실히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과 환경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나에게 가장 선한 것,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확실하게 걸어갈 것은 어떤 경우에도 믿음의 길에서 떠나면 안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바른 믿음의 선택을 하십시오. 믿음의 길에서 뒤로 물러나면 안됩니다. 자기 생각을 주장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한걸음 한 걸음 걸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든 믿음의 바른 선택을 하게 도와 주옵소서. 우리가 걸어가는 여정이 믿음의 여정임을 알고 어떤 어려움과 고난도 넉넉하게 잘 이겨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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