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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믿음을 통하여 주는 교훈
강동협 2021-01-23 추천 0 댓글 0 조회 723
[성경본문] 히브리서11:24-26 개역개정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모세의 믿음을 통해 주는 교훈

 

2021124일 창원더사랑교회 주일 설교

히브리서 11:24-26

 

샬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렇게 대면하여 예배하게 되니 매우 기쁘고, 이렇게 예배에 참여해 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제 주위에 제가 아는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말 단 한 번도 제가 아는 사람으로부터 교회에 다니자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전도를 받고 처음 교회에 다니기 시작 했을 때는 누가 교회에 다닌다는 얘기를 들으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반갑고 기쁜지 몰랐습니다. 마치 해외에 나갔는데 1년 내내 외국인만 만나다가 어느 날 길거리에서 한국말을 쓰는 한국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같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도 반가웠던 것이지요.

하물며 오늘 우리처럼 같은 기독교 신앙을 넘어서 더사랑교회라는 한 교회에 다니는 우리는 만날 때마다 얼마나 더 반갑고, 얼마나 더 기뻐하고, 얼마나 더 행복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이렇게 함께 대면하여 예배하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이렇게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예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기쁜 것인지를 우리가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코로나19라는 전염병 때문에 우리가 그 동안 대면하여 예배하지 못한 것이지, 대면예배를 하지 못하도록 정부가 감시하고, 예배하다가 붙잡히면 감옥에 갈까봐서 우리가 모이지 못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과거에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숨어서 예배를 드렸고, 지금도 북한에서는 그렇게 숨어서 예배를 합니다. 찬송가도 마음껏 부르지 못하고 속으로 삼키면서 부르고, 성경책도 숨어서 보고, 자식들 몰래 숨어서 성경보고,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그런 상황에 있었다가 이렇게 대면하여 예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쯤 춤추며 감격하며 예배하였을 것입니다.

 

코로나19로 대면예배를 하지 못하고 비대면 예배가 장기화되면서 많은 분들이 믿음의 길에서 떠난 분들이 생기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예배를 하지 못한 분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대면 예배를 하면서 아무래도 예배에 대한 마음가짐이나 말씀과 기도생활에서 소홀히 하게 된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셨습니까? 제가 예배를 할 때마다 늘 강조하였지만 비대면 예배를 할 때일수록 더욱 깨어서 기도하고, 예배 자세도 대면예배 할 때처럼 옷도 잘 차려입고 예배하자고 말씀을 드렸지만 아마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잠옷 바람으로 예배를 하기도 하고, 세수도 하지 않고 예배하기도 하였던 적도 있을 것이고, 아무래도 마음가짐이 이렇게 교회에서 예배할 때에 비하면 마음 자세가 느슨해졌을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는 이렇게 믿음의 길에서 떠나는 성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들은 초신자가 아니며, 과거 고난 중에도 믿음을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당하는 고난과 환난 앞에 모임을 폐하고 믿음의 길에서 뒤로 물러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임을 말하면서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믿음을 지키면서 인내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모세의 믿음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오늘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세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이스라엘 히브리 민족에게 가장 큰 시련이 닥친 때였습니다. 왜냐하면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지라는 왕의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왕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남자 아이를 출산한 이스라엘 부모들은 세 가지 중에서 선택해야 했습니다.

 

첫 번째 선택은 왕의 명령대로 남자아이를 나일 강에 던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몰래 숨겨서 키우는 것입니다. 셋째는 남자아이를 아무도 몰래 낳은 후에 애굽 사람의 집에 갖다 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씨 좋은 애굽 사람을 만나면 아이를 거두어서 그 사람의 노비로라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 당시에 히브리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였겠습니까? 아마도 제 생각에는 세 번째 선택을 한 사람이 가장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나일 강에 던진 사람도 있을 수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자기 자식을 나일 강에 던지는 것보다는 애굽 사람의 집에 갖다 놓는 경우가 많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세의 부모는 두 번째 선택을 하였습니다.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과 어머니 요게벳은 믿음으로 석 달동안 숨겨서 모세를 키웁니다. 그러나 모세가 점점 자라자 더 이상 몰래 숨겨서 키울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몰래 숨겨서 키우던 것이 발각이 되면 온 가족이 다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두 사람은 모세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겠지요. 그러다가 둘은 애굽왕 바로의 공주가 나일 강에 목욕하러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일강은 애굽의 젖줄입니다. 나일강은 고대 애굽인들에게 모든 풍요와 건강을 제공하는 성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여인들을 위한 특별구역을 지정하여 다산과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목욕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곳에는 애굽 왕실을 위한 목욕장도 있었는데 바로 이곳에 애굽왕 바로의 무남독녀인 핫셉슈트 공주가 자주 목욕하러 나왔던 것이지요. 모세의 어머니인 요게벳은 이 사실을 알고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과 함께 모세를 살릴 계획을 짭니다. 그래서 아기 모세를 갈대상자에 넣고 물이 갈대상자에 들어가지 않도록 역청을 바른 다음에 바로의 공주의 눈에 띄도록 나일강 갈대 사이에 놓아둡니다.

마침 공주가 갈대상자를 발견하고 열어보니까 그 안에는 아주 이쁘고 아름다운 아기가 울고 있었습니다. 아기가 없던 공주는 그 아기를 보니 히브리 아이인줄 알았지만 불쌍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지요.

 

마침 그 때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제가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할까요?”

 

미리암도 이쁘고 총명한 여자아이였기 때문에 공주가 미리암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그렇게 해라

 

그래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바로의 공주를 위하여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는데, 젖 땔 때까지 자기 집에서 젖을 먹입니다. 그것도 월급도 받아가면서 젖을 먹이다가 아이가 젖을 땔 때가 되어서 공주에게로 데려갔는데 공주가 모세를 아들로 삼습니다.

 

그 이후에도 요게벳과 모세의 관계가 계속 유지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젖을 먹인 유모이기 때문에 흔히 그 유모는 죽을 때까지 그 아이와 함께 관계를 유지하였을 것입니다. 어머니 요게벳은 모세의 유모로서 모세에게 히브리인의 교육을 하였고, 모세는 겉사람은 애굽의 왕자였지만 속사람은 히브리인이었고,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그러다가 모세가 장성한 어느 날 성 밖에 나갔다가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침 애굽 사람이 그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화가 난 것입니다. 애굽 사람이 동족인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니 동족의식이 발동하여서 애굽 사람을 때린다는 것이 그만 그 애굽 사람을 죽이게 되고 왕권을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관계에 있었던 까닭에 도망을 가게 됩니다.

 

사실, 모세는 유모인 요게벳으로부터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는 매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인정을 하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했다는 사 실을 알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24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모세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 애굽의 왕자가 아니라 히브리 사람의 정체성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모세의 믿음이었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한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의 행동을 주관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세의 행동을 주관하게 한 것은 공주의 아들, 왕자라는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행동을 주관하게 한 것은 히브리 사람이라는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고통 받는 것을 보고,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를 도와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권세가 자신의 행동을 주관합니다. 그래서 갑질이라는 것이 그렇게 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자신의 행동을 주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돈으로 무언가를 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회에는 다양한 지위와 신분이 있습니다. 대통령도 있고, 국회의원도 있고, 의사도 있고, 회사 사장도 있고, 대기업 임원도 있고, 교사도 있고, 공무원도 있고, 중소기업 직원도 있고, 학원 원장도 있고, 자영업자도 있고, 직장이 없는 사람도 있고, 세상 권세가 있는 사람도 있고, 전혀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히브리 사람의 정체성을 가진 모세의 믿음을 통해 우리가 배울 것은 우리에게는 다양한 지위와 신분이 있지만 우리가 늘 가져야만 하는 정체성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분과 지위가 나의 행동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나의 행동을 주관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행동을 주관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여러분의 모든 삶과 행동을 주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과감하게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이 세상의 신분과 지위를 과감하게 십자가 뒤에 숨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1:2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는 자신이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살아갈 것을 포기하고 히브리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믿음으로 선택한 순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습니다. 애굽 왕궁에서 바로의 공주로 살아가기 보다는 애굽의 노예로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모세의 믿음이 얼마나 훌륭한지 모릅니다.

원래 의를 행하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반면 죄악의 낙을 즐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죄를 짓는 것이 고통스럽고 힘들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죄악의 낙은 즐겁습니다.

여러분, 노름 한번 해보세요. 노름이 얼마나 재밌습니까? 밤을 새면서 합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배고픈 줄 모르고 하는 게 노름입니다. 그런데 그 노름이 가정을 파탄내고 인생을 망치게 합니다.

우리 학생들, 공부가 얼마나 힘듭니까? 그래서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것이지요. 반면에 게임은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고, 밤새면서도 할 수 있고,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부모 몰래 숨어서 할 수 있는 것이 게임입니다. 게임에 중독되면 부모를 버릴지언정 게임은 버릴 수가 없는 법입니다. 부모에게 욕을 먹어도 하고 싶고, 부모에게 맞아도 게임을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게임은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도둑질도 왜 합니까? 도둑질을 하면 재밌습니다. 스릴도 있고, 돈도 벌고 하니까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떡도 훔쳐 먹는 것이 더 맛있다고 했어요. 하여간 죄라는 놈은 재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지 말라고 해도 또 합니다. 그래서 죄는 저절로 짓는 것입니다. 배우지 않아도 죄를 짓게 되고, 애써서 노력하면서 죄짓지 않습니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죄를 짓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은 어렵고 힘이 듭니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어렵고 힘든 길을 스스로 선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의롭고 바른 길을 걸어가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의롭고 바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결심하고 또 결심해야만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죄악의 길, 불의한 길을 걷는 길은 쉽습니다. 억지로 결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의롭고 바른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이 길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학생 여러분!

공부하고, 기술을 배워서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입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가 싫습니다. 쳐다보기도 싫고 다 포기하고 싶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힘든 것이니까.

이것은 기술을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한 가지 기술을 배워서 전문가가 되는 것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언가를 배우다가도 중간에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하기 싫어하고, 기술배우기 싫어하고 그냥 재밌는 것만 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임에 빠지기도 하고, 미디어에 빠지기도 하고, 노는 것을 즐기기도 합니다. 죄악을 낙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좋고 편합니까? 인생사는 것이 이렇게 게임만 하면서 살 수있는 것이라면 평생을 이렇게 살아도 좋겠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으로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지금 고통스럽더라도 의롭고 바른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배우는 공부가 힘들어도 계속 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고, 여러분이 어떤 기술을 배우더라도 힘들고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배워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비록 지금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의롭고 바른 길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 육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은 쉽고 편합니다. 육신이 즐겁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나 자신을 죽이면서 사는 일은 결코 유쾌하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믿음의 사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고통스럽지만 나중에는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악의 낙은 잠시이고, 고통 후에 누리는 기쁨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죄악의 낙은 잠시입니다. 학생 여러분이 누리는 게임의 낙은 잠시인 반면 죄악의 낙을 누린 후유증은 매우 클 것입니다.

반대로 의를 위하여 고통 받는 것은 잠시이지만 의를 위하여 고통 받은 후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기보다는 의롭고 바른 길,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믿음의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깁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2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는 표현이 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기원전 1500년 전의 모세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모를 받았다는 말인가? 물론 모세가 당시에 자신이 받는 수모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당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모세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모를 당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가 왜 그렇게 해석했겠습니까? 히브리서를 쓸 당시에 그 편지를 읽은 당사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수모와 고난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박해와 고난에 굴복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모를 받는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모세처럼 지금 여러분이 당하는 수모를 그 어떤 보화보다도 더 소중한 재산으로 여기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잘 참고 견뎌낸 후에는 하나님께서 상을 주실 것이다. 그러니 지금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잘 참고 견뎌내어라.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그리고 우리 학생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는 고난과 박해, 혹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가 있다면 오히려 그것을 여러분의 자산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여러분의 자산으로 삼으십시오. 우리 격언에도 고생은 돈 주고도 못산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에게 있는 고난을 자산으로 삼고 그 고난을 잘 이겨내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더욱이나 여러분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당한다면 그것을 자랑하십시오. 여러분이 선을 행하고 박해를 당한다면 그것을 자랑하고 무엇보다도 그 고난을 더 큰 재물로 여기십시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선택으로 당하는 모든 고난과 수모는 우리의 재산입니다. 말씀대로 살려다가 어려움을 겪거나 고난을 당하는 것을 가장 큰 재물로 여깁시다.

 

앞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억울한 일도 당할 수도 있고,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손해를 볼 수도 있고, 고난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회가 앞으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가장 큰 재물로 여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2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11:26)

 

사랑하는 여러분, 코로나19로 대면하여 예배하지 못할수록 우리는 더욱 모이기를 힘쓰면서 성령 충만하고, 더욱 말씀 안에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오늘 특별히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히브리인의 정체성으로 살았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으로 우리의 행동을 주관하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는 바르고 의로운 길,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던 모세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와 고난을 우리의 자산으로 여기면서 믿음의 길에서 떨어지지 않고 오직 믿음의 선택을 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직 믿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믿음생활하기가 힘들어지는 요즘 더욱더 단단한 믿음으로 믿음의 선택을 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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