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삶의 신비
2020년 3월 22일 창원더사랑교회 주일 설교
마 7:1-6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사순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각 가정에서 잠언 40일 말씀묵상을 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동안 함께 모여 예배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사순절 기간이어서 잠언도 읽고, 잠언 40일 말씀묵상도 하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함께 모여 예배하지 못하고 떨어져 있을 때가 나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혹시라도 몇 주 동안에 가정에서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더라면 앞으로 더욱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막에 홀로 있다고 하더라도 살아남아야 하듯이 사막에 혼자 있더라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유난히 부담되는 성경책이 있습니다. 바로 잠언과 야고보서입니다. 그리고 사복음서 중에는 마태복음이 그러합니다.
어떤 사람은 잠언을 읽다가 죄책감에 사로잡힌다고 합니다. 잠언의 말씀이 좋기는 하지만 그 말씀대로 살기는 너무 어렵고, 그러다보니 잠언의 말씀을 읽다보면 죄책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잠언보다는 시편을 선호합니다.
어떤 사람은 야고보서가 행위를 강조는 서신이라 하여서 야고보서를 우습게 여기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 명확한데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였고,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고,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니까 그럴 만도 합니다. 그래서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사복음서 중에도 마태복음은 행위 구원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만 하더라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라고 말씀하셨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1-23)”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해 매우 실망을 하게 됩니다. 자신은 성경말씀대로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죄에 넘어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굉장한 죄책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면서 은혜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방종한 삶으로 나아가는 율법폐기론을 주장하는 경우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구원파입니다.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기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파는 아니지만 어떤 사람은 은혜를 너무 강조하다가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려는 노력을 터부시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잠언이나 야고보서의 말씀, 그리고 산상수훈의 말씀은 애초에 지키기 어려운 말씀이기 때문에 아예 지킬 생각도 하지 않고 넘어갑니다. 아무런 신앙 양심의 가책도 없이..그냥 넘어갑니다.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 해당되십니까? 아마도 구원파의 경우만 빼고 나머지 세 부분에 어느 정도 해당이 되실 수도 있을 겁니다.
오늘은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면서 마태복음 7장 1-6절까지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기독교인의 삶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읽고 암송하다보면 예수님이 살아가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 5:38-44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여러분, 예수님이 살아가는 세계는 어떤 세상이기에 이런 말씀을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살아가는 세상이 신비할 뿐입니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예수님은 그 자체로 신비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마 7:1-5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사람들은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면 그 비판이 틀린 비판도 아닙니다. 들어보면 맞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비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이 말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대통령에게도 해당이 되고, 여당이나 야당 대표와 장관에게도 해당이 되고, 국회의원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이 되는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4)”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보다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발견하는데 빠릅니다. 그래서 유독 자신에게보다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라고 합니다. 자신의 눈 속에는 것은 들보요,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은 작은 티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확실히 예수님이 살아가는 세계는 우리와는 다릅니다.
저는 이것을 ‘예수님의 신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신비한 분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세계는 우리 정신세계와는 다른 분입니다. 참 신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살아가는 그 신비의 세계를 우리로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자기 자신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살아가는 삶의 신비를 우리에게도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기독교인의 삶의 신비’라고 정하였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의 신비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득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독교인의 삶의 신비’라는 단어를 생각해 내고는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아하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였구나. 예수님이 살아온 신비한 삶의 세계를 우리로 살게 하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구나’
굉장히 설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산상수훈과 같이 지키기 어려운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책감을 갖게 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만도 아니고,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만도 아닙니다.
바로 예수를 믿는 삶의 신비를 누리게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는 사람의 삶의 신비를 누리고 계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삶의 신비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누리게 하려고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셨고, 천하보다도 더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비록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버겁게 느껴지는 말씀일지라도 그 말씀을 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살아가는 세계의 신비를 우리가 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신비를 어떻게 누리겠습니까?
유일한 방법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에 순종하는 것 혹은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율법적인 노력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예수님의 그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여러분, 이 말씀에 순종하면 용서하는 삶의 신비를 알게 됩니다.
며느리의 잘못을 용서하고, 시어머니의 잘못을 용서하고, 남편의 잘못을 용서하고, 아내의 잘못을 용서해 보십시오.
아빠의 잘못을 용서하고, 엄마의 잘못을 용서하고, 자녀의 잘못을 용서해 보십시오.
오빠나 언니, 형의 잘못을 용서하고, 동생의 잘못을 용서해 보세요. 용서하는 삶의 신비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상대방에게 노를 품고 있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를 믿는 신비의 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에 지원이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작은 봉투를 하나 건네주었습니다. 그 안에는 303비전 꿈나무 장학금 10만원, 우리교회에서 준 더사랑 꿈나무 장학금 10만원, 그리고 하늘이 열리는 다음세대 성경암송대회 상금 12만원. 총 32만원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님께 보내는 예쁘게 쓴 편지와 함께...
지원이가 이 돈을 김희경 선교사님에게 헌금하고 싶다고 하면서 저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몇 일 후에 김희경 선교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저에게 돈이 있는 줄 알고 마치 수금하려고 전화한 것 같다면서 지원이가 준 편지를 사진으로 찍어서 카톡으로 전해주고, 곧바로 입금해 드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지원이가 준 헌금은 미얀마에 있는 사역자에게 [미싱]을 사서 보낼 것으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원이는 이 말씀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원이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구제하는 사람이 구제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남에게 아무 댓가 없이 줘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기쁨을 알 수가 없습니다. 진실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김은희’라는 이름으로 우리 교회 계좌에 50만원, 목회훈련원 계좌에 50만원 총 100만원의 헌금이 들어왔습니다. 알아보니 제가 아는 김은희 집사님이 코로나19사태로 우리교회가 재정이 어려울까봐서 교회 통장으로 50만원을 보내고, 우리교회 암송사역에 큰 도전과 감동을 받았다면서 목회훈련원 계좌로 50만원을 입금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고마움과 동시에 약간 부담이 왔습니다. 목회훈련원 계좌로 보낸 것은 우리가 다른 교회 암송교육을 돕는 것을 후원하는 것으로 감사히 받을 수가 있는데, 우리교회 재정으로 보내온 것은 그냥 우리가 받아쓰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침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 학우회에서 5병2어 운동을 하면서 커피값 5020원을 입금하면 그 돈을 모아서 대구경북에 있는 미자립교회를 돕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엊그제 당회를 하면서 모퉁이헌금에서 50만 2천원을 오병이어 헌금으로 장신대 학우회에 보내자는 의견을 내었더니 장로님들이 대구경북은 전국의 많은 교회에서 도울 테니 우리는 100만원을 우리 지역을 도울 수 있도록 창원시청에 기부하자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김은희 집사님이 우리 계좌로 보내오신 50만원의 두 배인 100만원을 다시 지역사회에 환원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은 주어 보아야 압니다.
이것처럼 말씀에 순종해 보아야 예수님의 삶의 신비를 우리가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일 매일 기독교인의 삶의 신비를 누려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마다 그 신비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신비를 모릅니다.
잠언 40일 말씀묵상을 하면서 매일 매일 삶의 신비를 누리세요.
갑자기 솟아나는 분노를 참아보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신비를 누려보세요.
남편을 용서하고 아내를 용서하면서 삶의 신비를 누리세요.
누나와 싸움을 멈춤으로 기독교인의 삶의 신비를 누리세요.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꾸욱 참아보세요. 그리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얻는 그 기쁨과 신비를 누려보세요.
우리는 말씀에 순종할 때 삶의 쾌감과 재미를 느낍니다.
그러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불순종하게 될 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세요. 그래서 우리는 나 혼자 살아갈 수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이 아니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더욱 성령의 은혜를 구하세요.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어느 순간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누리게 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삶의 신비의 세계, 곧 기독교인의 삶의 신비의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삶의 신비를 누릴 수 있는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날마다 기독교인의 삶의 신비를 누리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와 즐거움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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