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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과 멸시를 당할 때
강동협 2020-09-05 추천 0 댓글 0 조회 486

조롱과 멸시를 당할 때

202096일 창원더사랑교회 주일 설교

(by 강동협 목사)

본문: 시편 123:1-4

샬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가 줌(ZOOM)으로 실시간 화상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코로나19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서 교회에서 모이지 않고 이렇게 각 가정에서 실시간으로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데, 영상 예배나 유투브 실시간 예배는 한 방향 예배여서 좀 주저하고 있다가 마침 줌(ZOOM) 이라는 좋은 프로그램이 있어서 지난 주간에 새벽기도회와 수요성경공부 시간을 통하여 예행 연습 차원으로 연습을 하고 오늘 이렇게 실시간으로 화상 예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우리 지체들을 보면서 함께 인사하겠습니다. 음소거 해제를 하신 다음에 손을 흔들면서 인사하겠습니다.

 

환영합니다. 사랑합니다.”

 

요즘 우리 한국교회가 욕을 많이 먹고 있습니다. 최악인 것 같아요. 최근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씨의 광화문 집회로 코로나 19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최근 한 달 사이에 교회가 생긴 이래로 안티기독교인들로부터 욕먹었던 것보다 더 많은 욕과 비판을 받는 것 같아요. 이번에는 안티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도 함께 교회를 욕하는 것 같아요. 참 예수님께 송구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여러분도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은 시기가 시기인 만큼 시편 123편의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조롱과 멸시를 당할 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23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아마도 포로시대 말기 혹은 포로 귀환 시대 초기에 대적자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았던 익명의 시편기자가 본 시편을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갔으니 얼마나 멸시를 많이 받았겠습니까? 우리나라도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사람들에 의해 멸시받고 조롱받았듯이 그들도 포로생활을 하면서 많은 조롱과 멸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조롱과 멸시를 당하는 것은 매우 기분 나쁜 일입니다. 왜냐하면 조롱과 멸시는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사람의 인권을 무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위를 요즘말로 표현하면 갑질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으로 연약한 사람을 멸시하거나, 자신이 갖고 있는 지위로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태도,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는 일도 있고, 피부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종을 차별한다든가, 동남아시아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를 무시하는 태도, 외국에서 우리나라에 시집온 다문화 가정의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에서 조롱과 멸시의 태도가 많이 나오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배경이 이스라엘이고, ‘조롱과 멸시라는 단어를 생각하니까 유덴 자우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유덴자우라는 말을 들어봤습니까? ‘유덴자우란 말은 독일어로 유태인 돼지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죽인 사람이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기독교와 가톨릭이 유태인을 경멸하기 위해 여러 성당과 교회들에 그림과 부조형태로 그려 넣은 것인데 유태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동물인 돼지의 젖을 먹고 있는 것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유태인들이 돼지의 젖을 물고 있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지요. 그래서 유태인들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그림을 그리거나 조형물을 설치한 것입니다(유덴자우 그림 참조).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멸시를 받았던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일 것입니다.

이렇게 멸시와 조롱을 당했을 때 이스라엘 민족들은 본 시편을 암송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럼 시편기자가 겪고 있는 조롱과 멸시의 상황을 살펴 보겠습니다.

3,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3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시편기자는 안일한 자에게 심한 멸시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안일한 자 또는 교만한 자라 하면 요즘 말로 갑질하는 사람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단지 개인적인 멸시뿐만 아니라 어쩌면 공동체 전체가 멸시를 당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그 멸시가 심한지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친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멸시를 당한다는 것은 매우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멸시를 당하면 자기 수치감을 견디지 못하여 좋지 않은 선택을 하기도 하고, 방황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자신의 영혼을 넘치게 할 때 시편기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1절과 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시편 기자는 하늘에 계신 주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한다는 말은 곧 기도한다는 말이지요.

 

느헤미야 2장을 보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착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려고 하자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조소와 멸시였습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느헤미야의 말을 듣고 업신여기고 비웃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보통 어떻게 합니까? 아마도 쾅 부딪힐 것입니다. 그들과 맞짱을 뜨겠지요. 그러나 느헤미야가 선택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였습니다.

 

느헤미야는 기도를 선택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이 멸시와 조롱을 이기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도 아주 심한 멸시와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53:3)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군중들과 로마 군병들에게 많은 멸시를 당하였고 조롱과 침뱉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화를 내거나 맞짱 뜨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선택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라”(53:12b)

 

기도는 주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우리의 눈을/ 우리를 둘러싼 답답한 현실에 고정시키기 보다는/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귀로 사방에서 들려오는 조소와 멸시의 소리를 듣고 기진맥진하기보다 그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직장생활 하다보면 갑질하는 직장 상사가 있어서 직장생활이 참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몸이 힘든 것은 견딜수 있습니다. 혼자 힘든 것이 아니잖아요. 함께 일하는 사람이 힘든 것이니까 참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직장상사 또는 직장 동료와의 관계속에서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직장에서 갑질하는 직장 상사가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직장을 때려 치고 나오는 방법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방법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직장 상사가 갑질한다고 모든 사람이 직장을 그만둘 수가 없지요. 그만두면 안 되고 끝까지 붙어있어야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끝까지 붙어있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끝까지 붙어 있어야 합니다. 끝까지 붙어 있어야 하는데 상사는 계속해서 갑질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때는 내가 아직 해보지 않은 최후의 방법을 써야 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딱 눈 감고 성경대로 사는 것입니다. 힘들고 하기 싫어도 딱 눈감고 성경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로마서 12:14절에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갑질하는 상사를 피할 수 있으면 좋지요.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됩니까? 직장을 내 마음대로 함부로 그만 둘 수가 없잖아요. 처자식이 있는데 마음에 안 든다고 그만두면 직장 계속 다닐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피할 수 없다면 성경대로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살아보자.

성경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16:7) 저는 반드시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람들은 문제에 부딪히면 그 문제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당면한 문제에 집중하다가 그 문제 속에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사방이 모두 막혀 있어도 능히 하늘 문을 열고 도와 줄 수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기자는 자신의 눈을 들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2절 말씀을 보면 시편기자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태도가 매우 필사적입니다.

 

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같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 표현이 참 특이한 표현입니다. 상전이 무엇이라 말하나? 입을 보고 눈을 쳐다보아야 하는데, 상전의 손을 바라봅니다.

 

당시 주인은 노예에게 직접 말하기 보다는 손짓으로 모든 것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잠시 동안 방심하거나 다른데 시선을 돌렸다가는 상전의 손짓을 놓치게 됩니다. 다른 곳을 쳐다보다가도 말을 하면 들을수는 있잖아요?

 

그런데 손짓을 시키니까 종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상전의 손을 필사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정신을 차리고 필사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잘 듣기 위해서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편기자는 멸시와 조롱을 당하는 가운데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심한 멸시와 자기모멸감이 들 때 그 문제에 매몰되지 말고 하나님께 필사적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 한국교회의 상황이 그러합니다. 8.15 광화문 집회 이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19 상황에 매몰되어서 전투적으로 싸우거나 변명하거나 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어요.

 

기독교 신앙은 항상 억울한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멸시와 수모를 당하고 십자가 형벌을 받았어요. 이 세상에서 억울해도 가장 억울한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바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 보았습니까? 바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자기 것 정당하게 다 챙기는 사람 보았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지요.

바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항상 먼저 손을 내밀어요. 다른 사람이 아홉을 잘못해도, 한 가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바른 기독교인입니다.

부부 싸움을 하면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형제간에 서로 마음이 상하면 먼저 손을 내밀어 사과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에요. 기독교 신앙은 손해 보는 신앙입니다. 그것이 맞아요.

 

기독교 신앙은 세상과 싸워서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에요. 정부와 싸워서 교회의 권리를 쟁취하는 것을 바른 기독교라고 알고 계십니까? 왜곡된 기독교에요. 변형되었어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님이 언제 로마 정부와 싸워서 권리를 쟁취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로마 정부와 싸워서 당당하게 교회 권리를 얻어낸 적이 있습니까? 교회는 박해를 받으면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면서 나아갈 때 교회는 순결하고, 성도들의 신앙은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능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간에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고 하기 보다는 배우자의 권리를 찾아주세요. 형제간에 자신의 입장을 말하기 보다는 형제의 입장을 배려해 주세요. 그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이렇게 조롱과 멸시를 당할 때 그 위기를 잘 이겨내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때가 오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와 관계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 그 사람과 맞짱 뜨기보다는 하늘에 계신 주님의 도움을 바라면서 성경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시고 모든 문제를 선하게 해결해 줄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위기 때마다 하늘에 계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주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쳐주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힘을 얻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능력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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